이창동 감독의 『소지』, 중국 독자를 사로잡다
등록일 2021-01-11 조회 73
중국에서 이창동 감독은 ‘현실주의 미학의 거장’이라 불린다. 중국의 ‘현실주의’ 미학은 매우 의미 있고 꽤 복잡한 전통을 지닌다. 단순히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는 의미를 넘어 영화예술이 인간의 삶에 접근하는 가장 이상적인 태도이자 준칙을 의미한다. 따라서 ‘현실주의적이다’라는 표현은 드라마, 코미디, SF, 액션 등 장르를 불문한 모든 창작작품에 보내는 최고의 찬사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영화평론가들은 <초록물고기>(1996), <박하사탕>(1999), <오아시스>(2002), <밀양>(2007), <시>(2009), <버닝>(2018)으로 이어지는 이창동 감독의 작품이 공개될 때마다 ‘현실주의 명작’이라는 호평을 보낸다. 좀 더 자주 이창동 감독의 명작을 보길 원하는 평자들은 신중한 그의 창작방식을 빗대어 ‘월드컵 주기만큼 기다려야 작품을 볼 수 있는 감독’, ‘8년에 한 번 칼을 가는 감독’이라며 애정 섞인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중국에서 소설집 『소지』를 출간한 이창동 감독 – 출처: 우한대학출판사, KOFICE>
<버닝>이후 이창동 감독의 신작을 기다리고 있던 중국 시네필들은 지난 한 해 그의 소설집 『소지(烧纸)』(이창동李沧东 저, 김염金冉 역, 우한대학출판사, 2020)로 그 갈증을 달랬다. 분단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긴 『소지』는 한국에서 2003년 출판된 바 있다. 2020년 2월 출간된 중국판 『소지』는 한국판과 마찬가지로 이창동 감독의 1983년 등단작 「전리」를 비롯한 총 11편의 단편소설을 수록하고 있다. 중국에서 『소지』는 이창동 감독의 작품세계와 한국의 근현대사를 탐독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책을 펴낸 우한대학출판사는 『소지』의 열기를 이어 이창동 감독의 또 다른 소설집 『녹천에는 똥이 많다』 (이창동 저, 문학과지성사, 1992)의 출판을 위해 중국어 번역을 진행하고 있다.
<“2020년 더우반 도서 순위” 부문별 차트를 석권한 『소지』 .
책과 더우반 트로피, 외국 문학 1위, 베스트셀러 3위, 화제의 도서 4위 – 출처: 우한대학출판사 공식 시나웨이보, 더우반>
『소지』는 최근 발표한 “2020년 더우반(豆瓣) 도서 순위” 부문별 차트에서 상위권에 올라, 한 해 동안의 인기를 입증했다. ‘더우반’은 중국 최대 문화콘텐츠 리뷰사이트로 중국 내 문화콘텐츠의 실질적인 인기와 파급력을 파악할 수 있다. 이번 연말 결산에서 『소지』는 “2020년 외국 문학 순위” 1위, “2020년 더우반 베스트셀러 순위” 3위, “2020년 화제의 도서 순위” 4위를 차지했다. “2020년 외국 문학 순위”는 한 해 동안 중국에서 출판된 외국 소설 중 더우반 리뷰에 참여한 네티즌 수가 많아 화제작이 된 작품을 선정한 것이다. “2020년 더우반 베스트셀러 순위”는 더우반에서 직접 판매한 서적의 판매량 순위를 집계한 것이다. “2020년 화제의 도서 순위”는 중국 작가를 포함한 세계 작가들의 작품을 통틀어 더우반에서 화제를 모은 작품을 선정한 것이다.
<지난해 개최된 “이창동을 읽다” 좌담회. 다이진화 교수 · 김진우 주중한국문화원장 · 우앙 칼럼리스트가 참석했다 – 출처: ‘단독(单读)’ 위챗 공식계정>
중국 대중들은 “마치 11편의 영화를 본 것과 같다(아이디: 小百合爱吃肉)”고 평가한 한 더우반 네티즌의 글에 많은 공감을 표했다. 이 네티즌 평은 『소지』의 2쇄판 홍보문구로 인용되기도 했다. 전문가들도 책에 대한 관심과 호평을 보냈다. 먼저 북경대 다이진화(戴锦华) 교수는 “그는 위대한 감독으로서 우리에게 훌륭한 영화 작품을 보여줬고, 좋은 소설가로서 우리에게 소설의 텍스트를 주었다. 그의 소설집과 영화는 우리에게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모범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어떻게 예술을 통해 이를 이행하는지 보여준다”라고 평했다. 《신주간(新周刊)》의 칼럼니스트 우앙(巫昂)은 “그의 소설은 기술적으로 견고하고, 불편한 부분을 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북경전영학원 추이웨이핑(崔卫平) 교수는 “'작가'라는 신분은 이창동에게 특히 중요하다. 그가 작가라는 것은 그만의 독창적인 작업을 한다는 것이고, 어떤 독특한 각도를 찾아, 세상을 향해 특별한 말을 건넨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평했다.
<이창동 감독은 중국 '하이숏!영화제'의 온라인 대담에 참여해 단편영화 제작 근황을 알렸다 – 출처: 하이숏!영화제 제공>
한편, 이창동 감독은 최근 중국 '하이숏!영화제(HiShorts!假电影节)'의 온라인 대담을 통해 중국 시네필들에게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올해로 4회를 맞이한 하이숏!영화제는 중국 샤먼에서 열리는 단편영화제이다. 이번 대담은 중국에서 한국영화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중국전매대 범소청(范小青) 교수가 진행을 맡아 “나와 우리가 찍고 있는 단편영화”를 주제로 이창동 감독과 <버닝>의 시나리오를 집필한 오정미 작가가 함께했다. 코로나19 시대 영화창작과 일상의 변화 등에 관해 자유로운 대화가 오갔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이창동 감독은 한국의 여러 감독과 공익 옴니버스 영화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12월 초 촬영을 마치고 현재는 후반작업 중이라고 한다. 정식 장편영화는 아니지만, 이창동 감독이 처음 시도하는 단편영화에서 어떠한 연출미학과 메시지를 전달할지 기대가 된다. 더불어 2021년에는 이창동 감독을 중국에서 오프라인으로 작품과 함께 만날 수 있길 바라본다.